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장소의 기억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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냄새. 연탄. 아궁이. 골목. 병아리. 오락실. 이빨.

그 많던 내 이빨은 어디로 갔나.

유치원 다니던 나의 6살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.

00유치원에서 열심히 놀고, 바로 윗 골목길 따라 3분만 걸어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었다. 대문 앞에는 그새 열정을 다 태운 살색연탄들이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고, 고진세월 견딘 색감을 머금고 있는 대문을 열면, 저 멀리 부엌에서 뭔가 부스럭부스럭 마당창고에서도 부스럭부스럭 이리저리 집안일 열심히 이신 엄마를 스쳐지나간다. 최종 도착지는. 기단 한 단 올라 신발 벗고 대청마루 밟고 안방에 입성한 후 벽 아닌 벽장을 열면 90도 경사를 가진 5계단을 타고 다락방으로 입주한다.

나의 신체에 적합한 공간 구성. 좌.우 굴러도 문제가 없는 곳. 그러다 상.하로 갑자기 똑바로 설 경우 이 놈의 보(기둥 위에서 지붕의 무게를 전달해주는 건축 부재)가 내 머리를 찧는다. 그리곤 다락방 창문을 열고 마당에서 부스럭거리는 엄마를 향해 그냥 운다.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는데, 왜케 울었으며, 뭔들 알아봐달라고 꼭 엄마를 바라보면서 서글프게 울었을까.

혼자서는 보에 몇 번을 찧어도 아무렇지 않아하면서 말이다. 매주 오는 학습지 숙제를 마치면 바로 마당 쪽마루에 앉아 오빠를 기다린다.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공부 잘하는 우리 오빠는 나와는 반대로 조용조용했다. 우리 아현동 남매의 힘을 볼 수 있는 곳은 집 앞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오락실. 워낙 오빠와 나는 이때보다도 더 어렸을때부터 친해서, 늘 손을 잡고 다닌 기억이 난다. 오락실 역시 서로 다정하게 한 웅큼 동전을 들고 ‘소닉과 버블버블’을 끝장내러 간다. 몇 번 끝을 냈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기록을 줄이기 위해 매일같이 가고, 또 가고 하루에 두 세번이나 간적도 있다. 그러다 밤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아서 엄마한테 된통 혼나서 007방불케하는 따로 오락실에서 만나 따로 집으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. 이 집은 오빠와 친척오빠와의 추억이 많이 머금은 곳이다.

왜 화장실은 밖에 있을까. 아니, 왜 신호는 밤늦게 찾아와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할까. 이때는 역시 우리오빠. 단 한번도 짜증내지도 않고 화장실 문 사이를 두고 소곤소곤 별일 아닌 이야기들을 한다.

“오빠 있어?” “응. 있어.” “진짜 있어?” “...........” 이럴 때 끝내고 나온다.

자, 나 다음은 오빠차례. 결과적으로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우린 화장실 갈 때 늘 함께였으며, 짜증을 내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사이였다.

매 주중 아침만 되면 부엌에 엄마 혼자 또 열심히 부스럭부스럭 검은 연탄에 붉은 빛을 선사해주시고, 이 빛은 곧 아궁이에 전파되어 우리 가족과 친척오빠들 총6명의 배를 채워준다. 한 겨울엔 아궁이에서 데운 따스한 물을 고무대야에 옮기고, 엄마가 나를 후다닥 씻겨 주신다. 어찌나 추웠던지 부엌문 열고 대청마루 문 열고 방 도착하자마자 온 몸을 이불 속으로 슬라이딩했다.

다시 또 아침이다. 일단 마당 수돗가부터 시작이다. 학교 갈 준비로 바쁜 대학생오빠들과 초등학생오빠. 난 유치원생. 지금 생각해보면 왜 우린 같은 시간에 이빨을 닦았을까.

아, 지금과 달리 세면대가 없어서, 넓은 마당에서 자기 구역을 가지면서 세수하고 이빨을 닦았던 것 같다. 어차피 물길을 하나니깐.

마당에서 세수를 하면 하나같이 거울로 몰려들었다. 주로 내가 거울앞에 있었지만, 이유인즉슨, 일주일에 두 세 번 꼴로 나의 이빨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이다. 이~아~하고 있으면 친척오빠2인. 아빠1인. 3명의 성인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실로 나의 이빨을 메고, 셋 세면 땡긴다는 말은 늘상 거짓말이였고, 하나! 하면서 나의 이마를 쳤던 가족들. 나의 이빨들은 고스란히 마당 옥상으로 들고 올라가 까치에게 헌 이빨 줄테니 새 이빨 달라는 떼쓰는 기도와 함께 지붕기와 넘어로 힘껏 던지곤 했다. 뛰어놀기 좋아한 나이라 집안에서 열심히 뛰놀다가 창문이 많은 우리집에서 문지방 밟으면 복 날라간다는 부모님 말씀에 이리저리 뛰놀아도 문지방 만큼은 늘 점프로 무마했고, 건넛 아궁이 노란색 방바닥은 왜 항상 창가 구석 한 부분만 따스해서 한겨울이 되면 마치 여기가 명당이라고 검게 그을린 표시로 여러 사람들을 유혹했다. 어른들 사이에서 그 자리에 앉기 위해 부단히 노력도 했다.

한 밤중에 대청마루에서 손발톱을 자르고 있으면, 부모님은 손발톱 아무데나 버리면 쥐들이 먹을꺼라고 하면서 먹은 쥐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날꺼라는 말에 늘 바로바로 쓰레기통에 버렸지만, 가끔 마당으로 튀어서 찾을 수 없을 때는 편히 하루를 잘 수 없는 두려움도 느끼기도 했다. 이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법칙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,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3학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냈다.

어느날 오빠와 매일같이 가던 오락실에서 수십판 열정적으로 끝을 낸 후 집에 돌아오던 골목 전봇대에서 병아리 4마리 든 상자를 발견하고 언른 집으로 데려갔다. 하지만 한 밤중, 이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많다는 것을 까막히 잊은채, 마당 옥상에 병아리들 오픈형 집을 만들어 줬건만, 다음날 아침 단 1마리만 남겨지고 3마리는 사라졌다. 분명 새벽에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, 우리 병아리가 아닐꺼라고 그냥 곤히 잠든 저와 오빠는 사건 당일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. 최후의 한 마리는 그날 이후 집안에서 키우고, 그 집을 이사하면서도 계속 가족들과 함께 2년 가까이 살았지만, 엄마가 양계장에 5천원에 팔고 나서야 엄마와 말도 안하고 한동안 치킨도 절대 먹지도 않았다. 가끔 삐약이와 그 한옥집을 그리워진다. 고등학생이 되어 그 동네에 다시 찾아가보니, 이렇게 골목이 작았나 뭐가 더 지어졌나 했는데, 오빠 말로는 그대로라고 하는 걸 보니, 어릴때는 뭐든 다 크게 느껴지나 보다.

당시 동네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물이 있었다. 현재 실내건축업을 해서 가늠해보면 그 무서운 건물은 1층 전체가 주차장 이였던 것 같다. 1층은 어두컴컴해서 마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괴물처럼 보였다. 그 안으로 자동차들이 먹힌 걸로 기억한다. 유치원이 이 근처라 3.4층 높이에 000아파트라고 적혀 있었고 밤에는 절대 그리로 지나가지 않았었다. 솔직히 낮에도 이 길로는 잘 안 지나갔다. 아침에도 아~하고 뭔가 잡아먹을 것처럼 입벌린 괴물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. 그 건물의 정체를 엄마에게 물어보니 남아현아파트였다고 한다. 현재 예미원아파트로 개명을 했다고 하는데, 조만간 이 친구를 제대로 찾아가보려 한다.

35살이 된 지금도 집착하듯 다시 이 집, 이 동네로 돌아가고 싶다.

_우리집 이야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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